밴쿠버 올림픽 동메달 리스트 사이먼 조, 이민개혁 촉구
1996년 어느 날 캐나다 벤쿠버의 국경 지역. 4살의 어린 꼬마는 숨 죽이듯 ‘조용히’ 하라는 엄마의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대신 엄마와 여동생의 손을 꼭 잡았다. 가슴을 졸인 채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부모님, 여동생과 함께 시애틀에 도착했다. 서류미비자(불법체류자)가 뭔지도 모른 채 그렇게 이민 생활은 시작됐다. 그로부터 14년 뒤 이 꼬마는 미 국가대표 선수로서 동계 올림픽에 출전, 값진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아메리칸 드림이 이제 막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주인공은 지난 2월 벤쿠버에서 열린 동계올림픽 남자계주 5000미터의 동메달 리스트인 한인 사이먼 조(한국명 조성문·사진)군. 27일 워싱턴DC에 있는 전국이민포럼(National Immigration Forum) 본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경험담을 담담하게 털어놨다. 아직은 장난끼 많은 앳된 18세 청소년의 얼굴이지만 말과 행동은 성숙함이 묻어났다. 부모님에 대한 얘기를 꺼낼 때는 떨리는 목소리와 붉어지는 눈시울을 애써 감추려는 의젓한 ‘효자’였다. 사이먼은 “불체자라는 신분을 겪어봤기 때문에 그 고충과 애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며 “올림픽 메달리스트로서의 성공이 부모님 세대와 지금 청소년들에게 힘이 되고 나아가 이민개혁을 촉구하는 데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 자리에 섰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국경을 넘었던 순간을 기억했다. “어려서 뭐가 뭔지 몰랐지만 많이 혼란스러웠어요.” 온 가족이 불체자였기 때문에 학교 등록도 아버지의 운전면허증 발급도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그는 지금 생각해도 마음 아픈 것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생하셨던 부모님을 떠올릴 때라고 했다. “아빠, 엄마 얼굴을 볼 날이 없었어요. 항상 제가 깨기 전에 일을 나가서 잠이 들어서야 들어오셨으니까요. 휴일도 없이 1년 365일을 일만 하셨어요. 오로지 자식들의 성공을 위해 고생하신 거죠.” 수도나 전기세가 밀려서 물도 안 나오는 깜깜한 집에서 지내는 것도 부지기수였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사이먼 가족은 2004년 시민권을 취득하게 된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스케이트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 그는 부모님의 지인 도움, 그리고 스스로의 피나는 노력 끝에 2009년 당당히 미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불체자에서 국가대표가 되기까지 어려웠던 일은 셀 수 없이 많아요. 부모님을 원망할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꿈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되돌아 가기에는 지금까지의 가족들의 노력이 너무 아까웠어요.” 그가 올림픽 국가대표 선수로서 첫 발을 디딘 장소는 다름 아닌 10여년 전 밀입국을 했던 ‘벤쿠버’였다. “올림픽 대표선수로서 벤쿠버를 다시 찾았을 때의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 가 없었어요. 묘했지요. 불과 10여년 전에는 밀입국을 했던 곳이잖아요. 제게는 너무 큰 의미가 있었어요.” 지난 21일에는 백악관에서 다른 동계올림픽 참가 선수들과 오바마 대통령을 만났다는 그는 “가슴이 떨려서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얼마 전에는 모교인 메릴랜드의 스톤밀 초등학교에서 후배들 앞에서 연설도 했다. 사이먼은 이번 동계올림픽에서의 메달 획득은 ‘성공’이 아닌 “꿈을 향한 도전의 시작”에 불과하다고 했다. “앞으로가 진짜 시작이에요. 올림픽 금메달을 목표로 더 열심히 훈련할 거에요. 또 제 사례가 좋은 예가 돼서 불법체류자들도 국가에 도움이 되고 이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요. 그래서 하루 빨리 이민개혁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어요.” 사이먼의 또 다른 꿈은 올림픽에 출전하는 아들을 위해 작은 식당까지 처분한 부모님을 호강시켜드리는 것이 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꼭 부모님께 다시 식당을 사드리고 싶어요. 아빠, 엄마가 지금까지 흘리신 눈물, 땀…제가 다 닦아드릴 거에요.” 그는 예전의 자신처럼 서류미비자로서 아픔을 겪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꿈을 절대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도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거를 뒤돌아보지 마세요. 부모님이 이민을 택한 것은 궁극적으로 자녀들의 성공을 위해서예요. 꿈을 포기하는 문제는 내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사이먼 군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한인으로서의 자부심도 빼놓지 않았다. “전 어디까지나 한인인 게 자랑스럽고 한국 문화와 음식을 사랑해요. 아니 한국을 사랑해요. 앞으로 미국에서 자랑스러운 한인이 되도록 노력할 테니 꼭 지켜봐 주세요.” 이성은 기자 graceful@koreadaily.com